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코프 주가슈빌리 (문단 편집) === 아버지와의 갈등 ===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후인 1921년에야 스탈린은 14살이 된 야코프를 찾아가 [[모스크바]]로 데려와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에게 키우게 했다. 같은 해에 배다른 동생 [[바실리 스탈린]]이 태어났다. 하지만 스탈린은 애지중지했던 바실리와 달리 야코프를 무척이나 싸늘하게 대했다. 스탈린은 공공연하게 야코프를 바보라고 망신을 주었다. 스탈린은 정치에 바빠 가정일에는 소홀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스탈린의 후처 나데즈다가 야코프의 교육을 담당했다. 하지만 야코프와 새어머니 나데즈다는 6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야코프는 그런 어린 새어머니와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한 모양이다. 스탈린의 집안에 들어온지 1년이 지난 1922년 10월, 나데즈다는 시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소소]]도 안부를 전합니다. 그이는 아주 건강하고 기분도 좋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생각도 한답니다. 야샤(야코프)는 공부하고, 뛰놀고, 담배를 피우고,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실리 스탈린|바센카]] 역시 뛰놀고,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담배는 안 피우는데, 머지 않아 이오시프에게 배워 담배도 피울 거예요. 이오시프가 파피로스카 담배[* 해당 번역본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папироска(파피로스카)는 (필터 유무와 상관없이) 물부리 달린 궐련을 의미하는 папироса(파피로사)에 지소사가 붙은 형태다. 즉 브랜드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반명사다.]를 피울 때마다 늘 아이에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까요.|| 이런 기록 등으로 볼 때 상당히 삐딱선을 탔던 모양이다. 1926년 나데즈다는 야코프가 정신을 차리기는 완전히 글렀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데즈다는 야코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고 하면서 헌신한 모양이고 둘의 관계는 이후에 매우 좋아져서 나데즈다는 사실상 야코프에 대한 유일한 방패막이가 된다. 1925년 야코프는 기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스탈린에게 동급생 조야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스탈린은 길길이 날뛰면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야코프는 가출하여 조야와 동거했다. 결혼을 둘러싼 스탈린과 야코프 부자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결국 18세의 야코프는 항의표시로 부엌에서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총알을 빗나갔고 야코프는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자살을 시도한 아들에게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른다고 비웃었다. 야코프는 병원에 석달 가량 입원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결혼을 둘러싸고 부자간의 극한 대립은 이어졌다. 결국 1928년 4월 9일, 스탈린은 나데즈다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실상 아들과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야샤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너는 망나니, 공갈배, 강도처럼 행동했고, 너와 나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나는 너와 더이상 어떤 관계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어떠한 일도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데서 아무거나 하고 네 멋대로 살아라." 야코프는 퇴원하자마자 레닌그라드로 떠나서 살았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야와 결혼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그는 화력발전소 전기기사로 일했다. 스탈린은 야코프 일가를 찾아가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얼마 후 야코프와 조야는 딸을 낳았다. 스탈린은 손녀가 생겼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코프 일가를 무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불행히도 딸이 죽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살시도까지 하며 했던 결혼이지만 얼마 후 둘의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했고 둘은 이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야코프는 새로운 여자와 동거했고 아이도 가지게 되었다. 스탈린은 아들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이후 스탈린은 야코프에게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요구했지만 야코프는 이를 무시하여 스탈린을 분노케 했다. 스탈린은 야코프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너는 내 아들이야!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보이겠니?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내가! 어떤 문제에서든 네 의견을 가질 수 있어. 그렇지만 아버지 생각도 좀 해라!" 결국 야코프는 마지못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와 사이는 좋지 않았고 왕래도 없었다. 그러나 야코프 역시 철없는 10대를 지나 20대에 들어서면서 차차 철이 들어가며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 노동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23세에 제르진스키 운송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대에 가끔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야코프는 모임에서 늘 조용한 태도였지만 바실리가 여자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두들겨팬 적이 있다고 한다. [[바실리 스탈린]]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이복 여동생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 당시 이름은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와는 사이가 굉장히 좋아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같이 놀기도 했다. 1935년, 야코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모스크바 항공학교 생도인 올가 골리셰바와 약혼하고 동거하였으나 파경을 맞이했다. 1936년 오데사 출신의 무용수이자 이혼녀인[* 전남편은 NKVD 장교인 니콜라이 베사라브였고 야코프와 율리야가 맨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결혼 상태였으나 불화로 별거하게 되고 곧 이혼한다.] [[유대인]] 여성 발레리나 유디트 "율리야" 멜처와 결혼하였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유대인]] 며느리를 마음에 불만스러워했으나 이미 다 큰 아들의 반복되는 결혼과 이혼에 지치기도 했고 스탈린의 병적인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기 전이라서[* 유대인 지도층 인물들을 사고사로 위장한 타살로 처리하는 등 스탈린의 반유대주의가 폭발한 것은 못해도 2차 세계 대전 후이다.] 예전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대 표시는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야코프에게 유대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곤 했었는데[* 공식적으로 소련은 일체의 인종 차별을 배격하였으나 일명 포그롬(pogrom)으로 대표되는 민간의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유대인 박해 및 학살은 물론 대다수가 나치의 짓거리였지만 이때다 싶어 민간인들이 저지른 경우도 없지 않았다. [[스테판 반데라]] 같은 케이스야 말할 것도 없고.] 그때마다 야코프는 열렬히 아내를 변호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야코프의 외숙모인 마리야 스바니제가 율리야를 교양도 없고 무식한 창녀라고 죽도록 미워했다. 게다가 어디서 들었는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는 괴상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1938년 2월에 딸 갈리나 "구랴"(1938~2007)가 태어났다. 한편 야코프와 파경을 맞이했던 올가 골리셰바는 고향인 스탈린그라드로 돌아갔는데,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1936년에 예브게니(1936~2016)[*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가 욕을 얻어먹자 '''할아버지가 너희들 잘먹고 잘살게 해줬으면 찬양을 해야지 까면 되느냐'''는 망언을 날려 우크라이나로부터 영구 입국금지를 먹은 비범한(?) 인물이다. 여기에 더해 이복 고모 스베틀라나가 아버지의 만행에 사과한다는 말을 하자 '''미친년이 노망났다'''고 까는 등, 확실히 제정신인 위인은 아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뒤늦게 예브게니의 존재를 보고받고도 자신의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사실상 남남이었다.][* 반대로 망나니로 유명했던 숙부 [[바실리 스탈린]]의 아들(예브게니의 사촌 동생)은 고모와 비슷하게 할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했다.]를 낳아 야코프에게 알리지 않고 예브게니 골리셰프로 이름짓고 혼자서 키웠다. 야코프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1938년에야 알게 되고 예브게니를 자신의 호적에 다시 올리기 위해 소송을 걸었지만 양육권은 골리셰바가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의심병 환자인 스탈린은 골리셰바를 의심했고 자신의 장손인 예브게니를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 [[파일:스탈린일가.jpg]] || || 1930년대 스탈린 일가의 모임, 왼쪽부터 [[바실리 스탈린]],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야코프. || 1930년대에도 야코프와 스탈린 부자는 사사건건 의견차를 보이면서 대립했고 야코프는 아버지의 의도를 따르기를 거부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서로 나이를 먹으면서 대립의 정도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부자간에서 서로 계속 의견대립을 보이면서도 예전처럼 서로 일방적으로 고집을 꺾지 않으며 평행선을 달리는 강도도 조금씩 줄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야코프의 끊임없는 여성 편력이 가십 아닌 가십이 되면서 스탈린은 야코프를 무척 불쾌해 했다. 그러나 본인이 반대한다고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예전처럼 대놓고 극렬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스탈린 역시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를 한 것이지 아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계속해서 아들에게 비난을 계속했다. 1930년대 말 야코프를 길러줬던 외가집 일가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 친가 이상으로 그에게 소중했을 외가집의 숙청 사건은 야코프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외가의 숙청 이후 본격적으로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양녕대군]]과 달리 야코프는 아버지의 막강한 권력의 힘에 압도당했는지, 또는 자포자기했는지 이시점부터 오히려 반항을 멈추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무렵 야코프가 스탈린의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 스탈린은 소련엔 기술자보단 장교가 더 필요하다고 아들을 질책하며 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의 말 따위야 가볍게 무시했을 야코프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야코프는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프룬제 군사대학]] 포병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5월 5일, 스탈린은 야코프와 포병군사학교 졸업생들을 크렘린에 초청하였고 좌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포병군사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의 공책을 어깨 너머로 보니 1916년에 퇴역한 대포들을 공부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쏟고 있더라고."라는 아재 개그도 시전했다. 어쨌든 본인의 의도대로 야코프가 군사학교에 들어가자 스탈린은 여름이 되면 야코프 일가를 전부 자신의 집에 부를 정도로 관계를 회복했다. 하지만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야코프가 포로로 잡힌 후 그의 처자식에게 했던 행동들을 볼 때 스탈린이 야코프 일가에 대한 신뢰와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